24 Feb
24Feb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 이수정 선생의 일본 흔적을 밟아보다

일본에서 복음을 접하다

이수정 선생은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자의 한사람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 출신이며, 이병규(秉逵)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유학 중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미국 선교사들을 한국에 데려오고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노력은 사도 바울의 마케도니아 여행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때때로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불렸다. 이수정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활력을 얻은 사도바울의 경험에 비유되기도 한다. 

 임오군란시 명성황후를 피신 시킨 공로로 고종은 그에게 벼슬을 제의하려 했으나 일본 유학길을 택한 이수정은 일본에서 농학자이자 기독교인인 '츠다센'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수정은 쓰다센을 만났을 때 그의 집에서 산상설교가 적힌 두루마리를 보고 성경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그로부터 중국어로 된 신약을 받았고 나중에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에 참석하여 성경을 받았습니다.  이수정은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지 7개월 만인 1883년 40세의 나이로 도쿄의 로케츠조 교회에서 부활절 세례를 받았다.

일본에서 활동과 미국 선교사 파송 요청

일본에서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설교하고 작은 신자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에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1890년까지 300개 교회에 42,000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수정은 일제에 대한 정서로 일본 선교사들의 조선 선교보다  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 줄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미국에 보냈다. 그 편지는 선교 저널에 실렸고 몇몇 저명한 미국 기독교인들이 읽게되었다. 

언더우드등 파송요청을 읽게되다.

테네시대 수석졸업생인 존 헤론(John Heron)은 대학 교수직 제의를 받았지만 기독교 선교 잡지를 보고 한국에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 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고, 이수정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운 뒤 1884년 제물포에 도착했다.마찬가지로 언더우드, 아펜젤러 , 그리고 Scranton 가족은 이수정의 글을 읽고 그가 번역하고 인쇄한 훈독 신약성서와 마가복음을 받아 1885년 미국을 떠나 한국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885년 4월 5일 부활
절인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을 받고 깜짝 놀랐다. 조선서 갑신정변이 일어나 일본 유학생들의 귀국을 종용했으나 이수정은 농업기술의 습득을 위해 귀국을 연기 하였다

이후 이수정은  1886년 5월 28일 고국으로 돌아와 44세에 사망하게되었는데 그의 사인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 그의죽음의 원인을 떠나 이수정이 한글성경번역, 일본 복음 전파, 미국의 한국 선교사 파견 동인 등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총신대학교 캠퍼스에 세워져 있다.


요코하마 이수정교회의 발자취


마가복음이 인쇄된곳

미국 성서공회 일본지부, 헨리 루미스 목사를 통해 이수정이 한글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고,인쇄는 요코하마 복음인쇄합자회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Comments
* The email will not be published on the website.